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생애 (문단 편집) == 빈에서의 성공 == 일종의 운명의 장난처럼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도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만하임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일단은 전업가수로 성공한 베버 집안의 요세파와 알로이지아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으로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집안에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적절한 돈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숙박업. 여기에 모차르트가 머물면서 그의 인생 2막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콜로레도 대주교의 빈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저택의 별사(別舍)에 머물렀는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때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여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 [youtube(ZsoZDehrllI,width=680)] || || ▲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K. 400. 조피와 콘스탄체(Sophie und Constanz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국 결혼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에 결혼은 사치라는 것이 그 이유. 게다가 콘스탄체의 어머니 세실리아 베버도 처음에는 모차르트를 음악을 한답시고 일정한 직업도 거처도 없이 빈둥대는 백수건달 정도로 여겼던 탓에 두 남녀가 너무 가까워지자 모차르트에게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하숙집에서 두 집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모차르트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아버지는 결국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세실리아 베버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오히려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부추겼다.[* 심지어 세실리아는 모차르트에게 자기 딸과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1년에 300플로린을 딸에게 지급하라는 소송을 걸겠다는 되도 않는 협박까지 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속물근성에 질린 탓인지 결혼 후에도 장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1782년 8월 4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모차르트의 가족들(부친과 누나)은 참석하지 않은 채 콘스탄체 집안 사람들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모차르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은 일찍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 항목에 있는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부분 참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nstanze_Mozart_Lange_1783_Lithography.jpg|width=200]]|| ||<:>20세 무렵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다수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본인의 연주로 공연되었는데, 공연때마다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 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하였다. 한편 당시 국립징슈필극장(Nationalsingspiel)[*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립"노랫말"극장''']의 감독이자 대본작가였던 고틀리브 스테파니(Gottlieb Stephanie)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세프 2세로부터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를 상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스테파니를 설득하여 이 오페라의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징슈필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탄생했다.[* 연구자들은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콘스탄체이며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이루는 내용 등을 볼 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콘스탄체는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알로이지아 베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니, 모차르트에게는 더더욱 이 작품이 특별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조지 프레드릭 헨델|헨델]]/[[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성악 처리법에 주목한다. 이런 작곡수법들은 이제까지 모차르트가 접하지 못했던 것들로 모차르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 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차르트는 바흐나 헨델의 몇몇 작품을 편곡하거나 고전파 수법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5개의 푸가 편곡(K.404) 이나 헨델의 오라토리오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편곡(K.566)이 있다.]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6곡의 하이든 사중주는 모차르트의 실내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들로 음악적 가치 못지 않게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에 12월에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K.477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Maurerische Trauermusik)이나 K.623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소 칸타타(Little Masonic Cantata). 그리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 최후반기에 작곡된 2개의 징슈필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 592a)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를 프리메이슨의 사상에 의거하여 씌어진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두 오페라의 대본작가가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인데 이 분도 프리메이슨 소속이다. 두 작품 중 현자의 돌은 모차르트와 다른 4명의 작곡가의 공동작품인데 상연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가 분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1996년에 음악학자 데이비드 버치(David Buch)가 이 작품의 모차르트의 자필 사본을 발견하여 현재는 연주 가능한 수준의 악보가 나와있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이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도 했는데, 특히 프리메이슨 동지이자 방직업자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에는 마스터 메이슨까지 올라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